마지막 읽은 소설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까마득했던 나를 일깨운 소설. 완독까지 1시간 30분이 채 걸리지 않은 쉬운 소설이다. 11월 무렵에 산 것 같은데, 필사를 하는 나에게 “필사의 밤”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담았다. 결제하면서도 ‘필사’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역이란 생각이 들어 ‘사실 수필인데 소설이라고 거짓말 하는 거 아니야?’ 싶기도 했다. 학과와 학업 그리고 입시에 집중하느라 오랜 기간 잊고 살다 다시 꺼내든 것도 역시 ‘필사’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책을 구입하기 전 목차나 자세한 설명을 읽지 않는 타입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 특히 필사라는 점에서 단편집이라 생각했으나 소설은 끝까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나.
지나치게 혹독하고 잔인한, 현실적인 육아 속에서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나. 서서히 나를 잃어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나를 되찾기 위해 잃어버린 책상 대신 잃어버린 나를 대신하는 새벽의 식탁 앞에서 노트를 펼치는 나. 나의 언어를 잃는 것을 두려워 하는 나. 그래서 필사를 하는 나.
이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지금까지 나에게서 나오던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필사를 해야 할 것 같은 이유’들이 책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나’와 실제의 나는 언어를 잃어버리는 두려움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가진 언어를 잃어버리면, 그건 곧 나를 잃어버리는 거라고.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필사하지 않는 것은 곧 나를 잃어버리는 행위라고. 단지 새로운 언어가 쌓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던 아주 작고 편협한 언어들까지 모조리 상실한다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와 나는 필사를 한다. 이제야 필사의 이유를 정립했다.
매일 시집을 읽던 나날이 있었다. 내 안의 언어가 전부 소멸해 아무것도 쓸 수 없던 시절. 이대로 소설을 못 쓰게 되리라는 절망에 빠졌던 때였다. 그건 나를 잃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 속 인물처럼 무수한 필사의 밤을 보내고서야, 소설이 아니라 시를 만나고서야,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일상도 소설도 늘 미진하기만 한 나는 그 시절처럼 매일 시집을 펼쳐 든다. 다시는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작가의 말, 191-192p.
그가 쓴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읽으며 숱한 공감을 했고 그 종착역은 작가의 말이었다. 내가 시집을 고르고 구매하고 읽고 소장하기를 마음 먹은 건 2019년의 끄트머리에서였다. 소설로는 채워지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 언어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를 습득하고 창조하고 조립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냅다 소설만 읽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것이 가장 큰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깨달은 건 2020년 5월의 일이다. 이렇게 나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소설은 윤이형의 <붕대감기 (2020, 작가정신)> 이후 7개월 만이다. 붕대감기에 이어 두고두고 아끼는 소설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나로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실에 대한 공포를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는 늘 최선이었으므로 덜 사랑했다는 아쉬움도 없었다.
- 우리의 정류장, 10p.